■황송문의 문학 강의/ “아름다운 시 쓰려면 어린이와 농부 닮아야” ① 이야기하는 시(詩)

동심(童心) 농심(農心) 시심(詩心)
황종택 기자 | resembletree@naver.com | 입력 2021-11-19 09: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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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송문 선문대 명예교수(시인·소설가)
문학(文學)은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는다.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인간과 사회를 진실 되게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언어를 통해 인간의 삶을 미적(美的)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문학을 일컬어 특정 주제를 가진 이야기, 시, 희곡의 모음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문학이 우리 삶의 새로운 감성체계를 만들어 주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면, 시와 수필, 소설가 등은 감성체계를 정초(定礎)하는 창조자이다. 그럼 오늘 한국문단의 위상은 어디에 있는가. 회의가 적잖다. 이에 세계일보 자매지 세계로컬타임즈는 한국 문단의 거봉 황송문(黃松文‧80) 선문대 명예교수의 문학 강의를 연재, 우리 문학이 나아갈 올곧은 지향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윤동주 시인 「무덤의 풀잎」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 「마음」 「내 마음」 「나의 시」 「시를 읊는 의자」)
성서에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시를 쓰려면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농심도 그렇습니다. 농심은 농부의 마음이지요. 돈을 번 다거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 농사를 짓는 게 아니고, 농작물이 자라는 기쁨을 보기 위해서 농사를 짓는 그런 농부의 마음이라야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자작농작물이 자라는 재미에 취해 사는 농부는 비료 값도 건지지 못한 다거나 이익이 없어도 불평 없이 농사를 짓지만, 돈을 벌 목적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이익이 없으면 그만두게 됩니다. 좀 야한 말로 하자면 때려치우는 거지요. 농한기에는 도박을 합니다. 돈이 목적인 사람은 그렇게 됩니다.

시심(詩心)을 시정(詩情)이라고도 합니다. 시의 정이 솟는 겁니다. 시심 이 솟는 심경을 말합니다. 그것은 맑고 고요한 경지를 말합니다. 마음속 에서 샘물처럼 용솟움 치고, 불꽃처럼 타오르는 시심이란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우선 자기가 존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모든 존재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시심이 샘솟게 됩니다.

1991년 7월 장마철 백두산 가는 길에 용정에 내려 윤동주시인의무덤을찾기로했습니다. 여름장마철에조선족 동포가 운전하는 지프에 올랐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무덤을안다던운전기사가공동묘지에있다는것밖에모른다고 했습니다. 지프는 마치 뱀장어처럼 이리저리 지그재그로 꿈틀거리다가 공동묘지까지 가지도 못했습니다.

빗물이흥건한경사언덕진흙이찰거머리처럼구두에 달라붙어서 공동묘지로 향하는 콩밭 사이 길은 팔열지옥을 방불케 했습니다. 진흙에 붙들린 구두는 천근만근 여간 힘겨운 게 아니었습니다. 콩밭 참외밭 샛길을 지나고 진흙의 늪을 지나 드디어 공동묘지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그런데 팥죽 끓듯 솟아있는 그 많은 무덤들 속 에서 윤동주 시인의 무덤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을 찾기처럼그렇게난감할수가없었습니다.그러나팔열지옥팔한지옥을거쳐온내가이대로돌아갈수없다는 생각에 무덤을 찾아 이름이 새겨진 푯말을 살펴보며 헤매 다녔습니다. 내가 모처럼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윤동주 시인이 나를 그냥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념에 그 에게 바치려고 들꽃을 꺾으면서 어둑어둑 어둠이 깔리는 공동묘지를 헤매었습니다.

천지신명께서 굽어 살피셨던지, 꿈결처럼 그 어둡고 무서운 공동묘지에서 윤동주 시인의 무덤을 발견했을 때는 밤 8시 12분이었습니다. 쏟아지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면서풀꽃을무덤앞에바치고큰절을하였습니다.절을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별 헤는 밤」 마지막 구절 이었습니다.“내이름자묻힌언덕위에도자랑처럼풀이무성할게외다.”를되뇌며머리를들고보니무덤에는 정말 무성한 풀이 보였습니다. 작품을 살펴가면서 이야기를 깊여 가고자 합니다. 자작시 윤동주 시인 「무덤의 풀잎」을 낭송하겠습니다.


그풀잎을잘라가지고돌아와재어보니30cm나되었습니다. 기념으로 가져왔던 그 풀잎은 세월이 흘러서 간 곳이없지만,내가슴속에는언제나그풀잎이살아서 숨을 쉬고 있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새벽마다 물동이 에 그 맑은 물을 길으시던 향나무 샘은 사라졌어도 도시 에 사는 우리들은 그 향나무 샘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듯이 윤동주 시인 무덤의 풀잎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윤동주 시인 무덤의 풀잎」이었습니다. 산문시 형태로 썼기 때문에 어떤 예술적인, 또는 시적인 운치는 기대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윤동주 시인의 무덤을 찾아낸 자초지종은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주제나 소재에 따라서 그 방법을 달리하게 됩니다. 자기의 경험이라 는 보석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고 궁리해야 합니다. 시로 쓸 것인가, 소설로 쓸 것인가, 수필로 쓸 것인가, 궁리해야 합니다. 작품의 효과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산문시를 잘 쓰지 않습니다. 산문시로는 시적 감흥을 살리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윤동주 시인 무덤의 풀잎」 같은 내용은 이런 형식에 담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썼습니다.

제가 만일 윤동주 시인의 무덤을 찾은 이야기로 끝냈다면, 별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시다운 시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결말에 “어릴 때 어머니가 새벽마다 물동이에 그 맑은 물을 길으시던 향나무 샘은 사라졌어도, 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그 향나무 샘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듯이 윤동주 시인 무덤의 풀잎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라고 의미부여로 매듭을 지었기 때문에 시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게 된다고 봅니다. 다음으로 전봉건 시인의 시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를 감상하겠습니다.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 먹어요. 이 불빛 아래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고요한 자리 잔에는 포도주를 따르지요 오 아니에요.
우리가 둘이서 잔에 따르는
이 포도주는 포도주가 아니라 꿈의 즙 우리는 진한 꿈의 즙을 가득히 잔에 따라 마셔요.
나는 당신 앞에 당신은 내 앞에
둘이서만 만난 둘만의 자리 사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오 배가 불러요
보세요. 우리가 정결한 저를 들어 생선의 꼬리만 건들어도
당신과 내 안에 들어와서 출렁이는 이렇게 커다란 바다 하나를.

전봉건의 시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였습니다. 이 시에는 설명되는 일상적 언어와 표현되는 예술적 시어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종래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새로운 사고와 기법으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서 핵심 이 되는 시정신은 ‘우리가 둘이서’입니다. 사랑에 젖는 심상에서는 이러한 비일상적인 공간관념이 시어로 통하게 됩니다. 둘이서 도모하는 사랑에는 되지 않을 게 없다고 하는 시정신이 결말에 가서 해명되고 정리됩니다.
이 결말 부분은, 둘이서만 만난 둘만의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 도 배가 부르다고 하는 심정적인 치열성이 내비치고 있습니다. 종교와 교 육과 언론과 문화가 제 구실을 못하는 차제에 물신주의와는 상관이 없는 연인과의 사랑은 위로가 된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아름다운 창가에 앉아서 빵에 잼을 발라서 먹게 되는데, 사랑하는 사람끼 리 빵에 바르는 잼은 잼이 아니라 과수원이라는 착상, 그리고 빵에 과수 원 하나씩 얹어서 먹는다는 창조적 상상력은 물질보다는 정신을 우위에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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