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기생충입니까?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겸임교수
편집부 기자 | | 입력 2019-08-02 1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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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겸임교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본 사람들의 평은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쾌감’ 이 대세다.

 

욕망의 문제를 들이대서 그런 것 같다. 

 

봉감독이 10년 전에 만든 영화 ‘마더’도 욕망을 다루었다. 엄마의 끈적대는 욕망이다. 

엄마의 욕망은 자연이라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있는데 가족 밖으로 비어져 나온 욕망은 좀 다른 문제인가 보다. 

관객들은 ‘기생충’에서 마음 깊이 잠겨있는 자신의 욕망과 결국 마주하고는 당혹해 한다. 

욕망을 보는 선진유학의 시선은 너그러웠다. 인간이 생명체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전제에 충실했다. 

욕망을 다 덜어내 버리면 생명활동에 지장이 오니까. 그렇다고 무한욕망을 지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절한 수위가 필요했으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 존재, 인간 본성에 대한 물음은 처절했다. 공자의 제자들이 선생님께 자주 질문을 한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주제에 별 말씀 안하시는 선생님에 대한 실망감은 ‘논어’에 이렇게 표현됐다.

“선생님이 성(性)과 천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얻어듣지 못했다” 수제자인 자공의 말이다. 

왜 공자는 인간 본성에 대해 확실하게 언급하기를 피했을까? ‘논어’를 달달 뒤져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구절이란 게 “타고난 본성은 서로 가깝지만(비슷하지만), 후천적인 습관 때문에 서로 멀어진다(달라진다)”는 말이다. 

선생님의 태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책임감이 떨어진다고 할까? 분명하게 콕 찍어주지 않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건 당시 제자들의 불만이었을테니 이쯤 해두자. 

하지만 이런 태도로 인해 공자의 대표적인 두 계승자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생겨난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다. 선생님의 견해는 다소 중립적이므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맹자와 순자의 의견이 갈릴 수 있다. 공자와 100년 정도의 차이로 태어난 맹자는 평생을 욕망의 문제와 씨름했다. 전국시대 초기 인물이었던 그는 팽배했던 제후들의 욕망을 토양으로 삼아 사상의 꽃을 피워야 했으니까. 

“맞아요, 왕께서 천하를 통일하려는 욕망을 가지신 건 당연해요. 문제는 방법이죠. 나한테는 기가 막힌 방법이 있어요. (자, 귀를 이리 가까이,...)” 말 수단 좋은 맹자는 사랑의 정치[仁政]에다가 갖가지 사은품을 붙여 왕을 유혹했다. “그러니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어요. 그게 그러니까,... 왕의 욕망을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거에요[與民同樂]” 이런 식이다. 

하지만 능수능란한 맹자도 고민에 빠진다. 목적은 욕심 많은 왕들에게 착한 정치를 하게 하는 것인데, 그러러면 ‘당신은 원래 착한 사람이에요!’ 라는 언명이 필요했다. 그렇게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게 됐다. 스승님께서 두리뭉실하게 말씀하신 중립적인 인간 본성은 맹자에 와서는 착한 쪽으로 내달린다. 의도는 분명한데 설득이 문제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사진='기생충' 예고편 갈무리)

이 대목에서 가만히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하면서 질문을 해보자, “나는 정말 착한 사람인가?” 무언가 찜찜한 느낌이 올 수 있다. 당당하게 “나는 본성상 착하다!” 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왜 그런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꿈틀거리는, 만족을 모르는 욕망을 충족해야 하니까.
 
맹자는 욕망과 본성의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고 좋은 냄새를 찾고 멋진 이성을 구하고 몸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명(命)이 관여한다. 그래서 군자(君子)는 이런 것들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명(命)은 분수다. 

존귀하든 빈천하든 위의 다섯 가지 욕망이나 다른 모든 욕망을 원하는 대로 다 충족하기는 힘들다. 능력이나 처지나 다른 무엇인가가 태클을 건다. 역사의 영웅호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마음껏 충족한 이는 없다. 이것이 바로 명(命)의 작용이다. 맹자는 이렇게 본성과 운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과감하게 내놓았다. (그리고는 하늘이 사람 마음에 심어둔 인의예지(仁義禮智)야 말로 진짜 인간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무한 욕망의 크기를 줄이고 자신만의 욕망의 크기를 알 때 그에 따르는 보너스도 있다. 바로 인생의 실망과 불행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라 로슈코프(La Rochefoucauld)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에 관해 의미있는 말을 남겼다. 

“근본적으로 행복과 불행은 그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작은 것도 커지고, 큰 것도 작아질 수 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큰 불행도 작게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조그마한 불행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스스로 큰 고민 속에 빠진다” 그래서 착하면 행복하다. 

욕망을 줄이면 그닥 불행할 일이 없다. 기생충이 될 위험도 애초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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