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3.1운동과 오늘의 현장 후손들

영광군, 전남에서2번째, 군단위 최초 독립만세 함성
이남규 기자 | diskarb@hanmail.net | 입력 2019-02-24 22: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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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컬타임즈 이남규 기자]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 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영광군의 3.1만세운동은 1919년3월14일에 시작됬다.
전남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3일이지만 만세시위는 3월10일에 일어났다.
광주에서는 숭일,수피아,농업의 3개 학교 학생이 주축이 되어 시민의 호응을 받아 일어났는데 전남도내에서는 4월18일까지 계속됬다. 

 
3월10일 광주에 이어 14일 영광과 해남,17일 담양, 18일 무안, 4월3일 장성, 8일목포, 9일 함평등 19개 시군이 가담했다.
이처럼 영광은 전남에서 2번째 군단위로서는 최초의 함성을 울린 곳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 의하면 참가인원 7600명에 사망자 6명, 부상자 50명, 체포 27명, 유죄판결로 옥고를 치른 숫자만도 16명에 달했다.

 

 

1912년경 영광공립보통학교 학생들.  첫 만세운동의 진원지 대성전 앞   

    (사진소장자=영광문화원지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정택근) 

 
영광최초의 만세시위는 영광보통학교 학도들에 의해 일어났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훈도 이병영과 3학년 정헌모 2학년 허봉 1학년 조술현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교촌리 김두학씨 집에서 비밀리에 구한국 국기를 제작하여 전교생 150명에게 나누어 주고 당시 학교였던 영광향교의 명륜당 교정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후 도동리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시위대는 남천리 조씨의 정미소앞에서 경찰과 충돌을 하게 되었고 150명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한 노도같은  행군은 군청과 경찰서까지 쇄도하여 잔학무도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주동 교사와 학생 대표들이 무장 왜경에게 현장 체포되면서 시위는 오후 5시경 해산되었다.

 

이병영 훈도는 징역2년을 선고 받았으며 그 판결문의 일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피고 이병영은 “나는 영광보통학교에 봉직중 금년 3월10일 3년생 급장 정헌모를 교실로 불러 동인의 의향을 물었더니 동인은 소요를 위해 적극 준비중이라고 하기에 무슨 이유냐고 물었더니 동인은 우리들 조선인은 대단히 속박당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독립을 찾는것 이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중략)

 

당시 나이 어린 학생들의 애국심과 기개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후배들의 거사에 크게 자극을 받은 영광보통학교의 선배들과 학생들의 수감에 심히 격분한 학부모들과 시민들은 15일 제2차 시위에 들어갔다.


2차 시위를 주모하였던 사람은 김은환 정인모 조희봉 조병현 박병문 박정순 박순채 유두엽 김준헌 등이었다.
이들과 군중들 약 500명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남천리 백학리 무령리를 경유하여 영광경찰서로 쇄도하였고 경찰서 구내에 까지 진입하여 만세를 부르기에 이르렀다.


진압 과정에서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폭행과 총검이 난무하고 피 범벅이 된 발포 현장은 끓어오르는 민족의 울분에 더욱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됬다.‘‘
그 충격과 분노는 영광군민 전체를 더욱 결속시키는 결과가 되었으며 3차 만세운동과 면 단위 산발적인 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2차 시위를 주도했던 지도자들은 5월6일 목포지원에서 김은환 정인영 각 징역2년, 조희방 조병현 박병문 박정순 각 징역1년6월씩을 언도 받았다.

 

▲ 사진제공=영광문화원지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정택근

 

 

14~15일에 이은 3차 시위는 27일로 계획되었는데 사전에 시위물품의 압수와 주동자의 검거로 아쉽게도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서순채, 유봉기, 조병완,김준헌,유두엽,조희태 등 6명이 주도한 3차 만세시위에서는 비밀리에  유봉기의 집에서 “隋(수) 唐(당)은 우리의 牌將(패장)이오 日本(일본)은 우리의 弟子(제자)로다. 독립의 권리를 잃지 말고 世界一等(세계일등) 우리 大韓(대한)”등의 단구를 인용 애국가라 칭하는 것을 만들어 26일 밤에 거리에 살포하고 태극기를 준비하여 다음날 27일 3차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일제에 의해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1919년5월6일 서순채(20세), 김준헌(17세),유두엽(21세)등은 각 징역1년을 선고 받았다.


1차 만세운동은 재학생 주도로 이루어 졌고 2차 만세운동은 30대 청년층인 졸업생 위주로 이어 졌으며 3차 만세운동은 학교를 갓 졸업한 소년층이 주도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영광군의 만세운동이 타 지방과 대비되는 특징이다.


영광읍에서만 연이어 3차례나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발맞추어 법성,대마,불갑,군남,군서,염산,백수,등  전 군적인 시위가 일어났으나 유감스럽게도 법성포 시위만 자료가 남아있다.

(참고자료: 영광군지 1994년4월 발간 )

 

일본 군경의 잔학무도한 탄압속에  애국 선열들의 만세 소리 비명이 아직도 들리는 듯한 그 현장에서 100년이 흐른 지금 후손들이  추념과 다짐의 기념식을 거행한다.

일본의 조선침탈의 야욕이 아직도 남아있음이 느껴지는 것이 지나친 기우였으면 좋겠다.

 

 

▲ 3.1운동 재현 거리 퍼레이드 코스 및 행진도 (제공=영광군청)

 

 영광군에서는 제100주년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을 기념하여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널리 알리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3월1일 10:30~12:00까지 진행되는 기념 행사는 군수,군의원,기관사회단체장,독립유공자 후손,보훈단체,군민, 학생등 500여명이 참석할 계획이다.


제1차 발원지인 영광향교에서 시작되는 기념행사는 영광여성합창단의 기념공연(노래)에 이어 3.1운동 관련 연극 공연으로 식전 행사가 이루어지며 국민의례,영광군 3.1운동 경과보고, 독립선언서 및 공약삼장 낭독,독립유공자 후손 기념패전달,3.1절 노래 제창,만세삼창순으로 진행된다.


11:20~11:50까지는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3.1만세운동 재현 거리 퍼레이드가 이어진다.
행진동안 삼일절 노래,독립선언문,영광삼일절 연혁이 방송되며 향교에서 남일경로당까지 약 1.3km를 행진하고 나면 참가자 전원에게 가정용 태극기가 배부된다.


거리 퍼포먼스가 개최되는 남일경로당 앞에서는 연극인 8명으로 구성된 단막극 “삼월의 바다”가 공연되며 만세삼창 후 행사가 종료된다.


김준성 영광군수는 “이번 3.1운동 기념행사가 군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시키고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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