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6·8 독도폭격피해 어민 위령제 70년 만에 지내…이제야 고혼들 넋 기려”

전충진 경북도 독도홍보사무관
온라인뉴스팀 | news@segyelocal.com | 입력 2018-06-14 03: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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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중순 경북 울진군 울진읍 온양리 마을회관 앞마당에는 지역특산물인 미역 말리기가 한창이었다. 마을 이장 박용길(78)씨는 채취한 미역을 가구마다 분배하느라 골목길을 분주히 오르내렸다.

“이제야 가슴에 응어리가 풀립니다.” 집 거실로 안내한 박씨는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냈다. 그가 보여준 빛바랜 호적등본에는 이례적으로 ‘박춘식, 독도 200 해상에서 사망’이라고 한자어로 또렷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여덟 살이었으니 소상한 내막을 알지 못했지요. 그때 독도에 미역을 따러 갔다고 해요. 그때가 두 번째 출항으로 동네 사람 여럿이 갔는데, 죽변에 사는 오종석 선주의 발동선은 돌아오고 아버지가 탄 배는 못 돌아온 거지요.”

박씨는 당시 독도에 같이 갔다가 살아 돌아온 마을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면서 연신 눈시울을 찍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날 배에 태극기를 꽂아놓고 독도에서 미역 채취를 하고 있었는데 비행기가 날아와서 마구 폭격을 했다고 그래요. 동굴 속에 피해 살아남은 울릉도 여자들의 말로는, 아버지 배는 폭격에 허리가 동강 났다고 해요. 그래서 묘소도 없습니다. 이 동네는 나 말고도 음력 오월 초이틀, 같은 날 제사 지내는 집이 저 아래 바닷가에 또 있어요.”

어릴 적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박씨의 평생소원은 독도에 가서 제사 한 번 올리는 것이었다. 그 한을 지켜보던 딸이 같이 나서자고 하여 지난해 독도에 갔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제를 올렸습니다. 울면서 절하는 모습을 보고 둘러서서 의아해하던 관광객들이 제 사연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충진 경북도 독도홍보사무관
1948년 6월8일 오전 11시쯤 오키나와 주둔 미 공군의 폭격으로 독도에서 미역을 채취하던 어민 14명(일부 기록은 16명)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당시 비극은 일본이 독도를 그네들의 영토라면서 미국 공군에게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하도록 그릇된 정보를 제공한 데서 발생했다. 이 사건은 미군정 하에서 서둘러 종결됐다.

6·8 독도폭격피해 어민사건은 오늘날까지 서로 다른 당시 언론보도만으로 그 진상이 알려졌다. 그래서 희생자 유족들의 행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경북도 독도정책과는 올해 사건 발발 70년을 맞아 6월8일 독도에서 위령 행사를 열고 유족 찾기에 나섰다. 그 결과 지난 4월 동북아역사재단팀과 함께 울진에서 모두 3가구의 유족을 확인했다. 역사의 그늘에 묻힌 사건의 전말이라도 밝히고, 독도 앞바다를 떠도는 고혼들의 한을 풀어주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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