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학당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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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선영 강사. |
내가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곳은 강의 현장이다. 내향적이고 관계에 서툰 내가 불특정다수 앞에서 말하는 직업을 가지게 될 줄이야. 글쓰기를 배우러 왔다가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고 읽고 쓰다 보니 강사가 되었다.
전공자도 아니고 오랜 기간 공부한 내공도 없어 개강 때마다 수강생들에게 미리 엄포를 놓는다. “나는 여러분보다 먼저 읽기와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내가 경험한 시행착오와 극복 방법을 알려주는 안내자입니다.”라고. 한 마디로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근원적인 질문을 많이 한다. 예를 들면 나에게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이며 글을 쓰는 의미 같은 것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어떤 대답으로 그 순간을 무마(?)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다른 학인(學人)에게 들었던 말들을 내 것인 양 했을 것이다.
책에서 길을 찾기 위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읽고 쓰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생존과 본능에 가까운 이유로 읽고 쓰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아, 그래서 지치지 않고 공부를 이어갈 수 있는 거구나.’ 나는 자주 슬럼프에 빠졌고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돌아오지 못하면 생계가 위험했다.
자기정의를 내리지 못한 강사로서의 내 말은 허공을 맴돌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독서토론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내 부족함을 채웠다.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말로 구현하면서 내 입장을 다져갔다.
나는 토론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어디서도 듣지 못할 값진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간을 버티는 것 자체가 힘든 토론이 있다. 생각의 다양성을 빙자한 혐오성 발언을 내뱉는 사람을 만날 때다. 대체로 이들은 자신의 말과 시선에 담긴 폭력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기 입장에 논리가 없기 때문에 말을 고를 수가 없다. 자기 언어의 부재는 다른 사람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든다.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드러나는 것이 조심스러워서 말을 아끼는 사람들도 있다. 말에는 평소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묻어나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 어떻게 보일까 자기 모습을 검열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안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당장 바꾸지는 못해도 내 생각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겠다는 의지다. 토론을 진행하는 나로서는 양쪽 모두 힘들지만, 그 결은 다르다.
<공부란 무엇인가>의 저자 김영민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면,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 만남에는 섬세한 언어가 필수적이다.” 토론에서 침묵과 듣기를 선택한 사람은 섬세한 언어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자기 상황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찰적이다. 그럼에도 침묵과 듣기만 하는 시간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섬세한 언어는 서툴러도 표현하면서 몸에 익혀야 하는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말로 재확인하고 틀을 깨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깨진 틀을 견고하게 지탱해주고 틈새를 잘 메울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조언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당사자의 감수성을 헤아릴 줄 아는 배려가 필요한데, 이때에도 ‘섬세한 언어’가 중요하다.
자신의 한계와 직면하고 섬세한 언어로 무장한 사람들은 점차 자기 색깔을 갖기 시작한다. 표정이나 태도에서 여유가 묻어나고 다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과해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 깊이를 더해가는 모습에서 연륜도 느껴진다. 그들을 보면서 비로소 내가 책을 읽는 이유를 찾았다. 나는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이것은 현재의 울퉁불퉁한 내 모습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며, 잘못된 것이라면 과감하게 바꾸겠다는 자기수용의 자세를 뜻한다.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불편함과 싸우겠다는 의지. 김영민이 말하는 ‘공부’의 정의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보고 있다는 감각을 주고, 그 감각을 익힌 사람은 예속된 삶을 거부한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 세상도 조금씩 희망의 빛을 띠지 않을까.
김영민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수업은 ‘지적 변화’를 목표로 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인다. “변화란 그냥 생기지 않고 좀 힘들다 싶을 정도로 매진할 때 비로소 생깁니다.” 새해의 1월이 채 지나지 않았다. 올해는 내가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무엇에 매진할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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